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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책 리뷰 : 호모데우스] Home Deus 미래의 역사 유발하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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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데우스



사피엔스로 유명한 유발하라리의 호모데우스 책 리뷰.
방대한 페이지의 내용을 함축적으로 담아본다.
3가지의 파트로 나누었으며, 정리를 하면서 책을 되돌아 보는 시간을 갖기위해 리뷰해본다.




1장


 



18세기 말 영국의 철학자 제레미 벤담은 '최대 다수의 최대행복'을 최고선으로 선언했고,
국가와 시장 그리고 과학계가 추구할 단 하나의 가치 있는 목표는 세상 모든 사람의 행복을 증진하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정치인들은 평화를 유지해야 하고, 기업가들은 부를 키워야 하고, 학자들은 자연을 연구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왕이 국가 또는 신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과 내가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이다.

 


복지제도도 원래는 궁핍한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국익을 위해 기획되었다.
주된 목적은 국민의 행복을 증진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충성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예전보다 우리는 음식, 식량, 휘발유, 등의 형태로 에너지를 60배 많이 사용한다.
60배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며 살아오지만 사람들은 60배 행복해졌는가?
경제적으로 풍족해졌지만 자살율은 더욱올랐다.
쾌감을 갈구하면 할수록 점점 더 많은 스트레스와 불만을 느낄 것이다.
그러니 진정한 행복을 얻으려면 쾌락을 빠르게 뒤쫓을 것이 아니라 놓아줄 필요가 있다.

 



우리는 과거에 경제가 어떻게 작동했는지는 알 수 있어도, 더이상 미래는 고사하고 현재 경제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도 이해하지 못한다.

 

 



사피엔스만이 수많은 낯선 사람들과 매우 유연한 방식으로 협력하고, 지구를 정복했다.
헌데 엘리트층이 주로 한 일은 하층민들이 협력하는 방법을 터득하지 못하게 하는 것 이었다.

 


영장류가 도덕적 본성을 지니고 있으며 평등은 보편적이고 영원한 가치라는 믿음을 갖게 했다. 사람들은 타고난 평등주의자여서, 불평등한 사회는 반감과 불만 때문에 제대로 돌아가지 못한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소규모 수렵채집인 무리에는 잘 들어맞는 듯하다.
하지만 대규모 사람들의 행동을 관찰하면 전혀 다른 현실을 발견하게 된다.
과거 대부분의 왕국과제국이 매우 불평등했지만, 그럼에도 대다수가 놀랍도록 안정적이고 효율적이었다.
대규모 집단의 사람들은 소규모 집단의 사람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대규모 집단은 각 집단 소규모로 지배층을 구성하고, 한 집단의 지배층이 다른 집단의 지배층에게 제안하고 불공평한 제안을 받아들이고 당근과 채찍을 결합해 추종자들의 반란을 막을 것이다. 지배층은 체제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즉시 무거운 처벌을 내릴거라고 위협하는 한편, 온순하고 참을성 있는 사람들에게는 내세에 영원한 보상을 받을 거라고 약속할 것이다.

 


이것이 고대 이집트와 18세기 프로이센에서 일어난 일이고,
지금도 전 세계 수많은 나라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이런 위협과 약속은 그것이 인간의 변덕이 아니라 자연의 필연적 법칙 또는 신의 신성한 명령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여겨지는 한, 흔들림 없는 위계질서와 대규모 협력 네트워크를 만드는 데 대게 성공한다. 인간의 모든 대규모 협력은 결국 상상의 질서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기반한다.

 


사람들이 더 이상 믿지 않게 되면 가치가 증발하는 것은 돈만이 아니다.
법, 신, 심지어 제국 전체에도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

 


한시대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였던 것이 후손에 이르러 완전히 무의미해진 다는 것을 깨닫는 일이다.
항상 그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고 설교했다.
만일 우리가 살인을 저지르거나 도둑질을 하면 신이 우리를 지옥에 보낼 테지만, 이교도를 죽이면 신은 우리를 천국에 들일거라고 말했듯이 말이다.

역사는 이런식으로 전개된다. 사람들은 의미의 그물망을 짜고 그것을 진심으로 믿는다.

 




신들은 인간의 상상 속 외에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지상의 일은 성직자들이 관리했다. 하지만 신들의 재산과 힘이 점점 커지자 성직자들은 감당할 수 없었다.
아무리 전능한 하늘의 신 또는 전지전능한 땅의 여신을 대변한다 해도 그들 자신은 부족한 인간이었다.

그들은 어떤 부동산, 과수원, 논밭이 이난나 여신의 것인지, 이난나 여신에게 고용된 사람들 가운데 누가 봉급을 이미 받았는지, 그 여신의 소작인들 가운데 누가 지대를 지불하지 않았는지, 여신이 채무자들에게 매긴 이자율이 얼마인지 일일이 기억하지 못했다. 전 세계 다른 모든 곳과 마찬가지로 농업혁명이 일어나고 수천년 지나서도 인간의 협력망이 이렇다 하게 확장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세계에는 거대한 왕국도, 광범위한 무역망도, 보편적 종교도 존재하지 않았다.

 

 


문자와 돈을 발명했을때, 이 장애물이 마침내 사라졌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났다는 점에서
샴쌍둥이와도 같은 이 두 발명품은 인간 뇌의 데이터 처리 한계를 깼다.

 


힘은 자기들의 허구적 믿음을 순종적인 실제에 강요하는 능력에서 나온다. 돈이 바로 그런 경우다.
정부는 무가치한 종잇조각을 만들어 그 가치를 선언한 다음, 그 종잇조각을 이용해 다른 모든 것의 가치를 계산한다.

 

 


파라오가 통치하는 이집트는 당대에 가장 강력한 왕국이었지만, 평범한 농부에겐 그 힘은 병원과 사회보장제도가 아니라 세금과 강제노동을 의미했을 뿐, 고된 노동의 대가로 그가 얻은 것은 병뿐이다.
역사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 힘 있는 사람에 의해 그들의 이야기로 전해진다.

 

 


인간의 협력 네트워크를 평가할 때 그 결과는 우리가 어떤 잣대와 세계관을 채택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역사에는 단 하나의 내러티브가 아니라, 수천개의 내러티브가 존재한다.

 

 


신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고 한다.
이 표현은 신은 존재하지 않지만 신에 대한 믿음이 뭔가를 하게 만들기 때문에 결국 도움이 된다는 말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항생제는 신과 달리 스스로 돕지 않는 자도 돕는다. 그 효능을 믿든 믿지 않든 항생제는 감염을 치료한다.



 


2장


 

 



근대 이후의 세계는 이전의 세계와 다르다. 이집트 파라오와 중국 황제들은 수천년 동안 시도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아, 역병, 전쟁을 극복하지 못했다 근대 사회는 몇백 년 만에 그 문제를 해결했다. 그것은 우리가 상호주관적 신화를 버리고 객관적인 과학 지식을 선택한 덕분 아닌가?

 


신화는 계속 인류를 지배하고 있고, 과학은 그런 신화를 더 강화할 뿐이다. 컴퓨터와 생명공학 덕분에 허구와 실제의 차이가 모호해질 것이고,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허구에 맞게 실제를 바꿀 것이다.
내가 믿는 것은 언제나 '진리'이고 미신은 남들이나 믿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종교를 창조한 것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고
종교는 사회 구조에 초인적 법칙이 반영되어 있다고 주장하며 인간의 규범과 가치를 정당화 한다.
(돼지고기를 먹으면 신이 우리를 벌하고, 나쁜 운명을 맞게 된단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신은 우리에게 돼지고기를 먹으면 안 된다고 말씀 하셨어. )

 


초인적인 도덕법에 복종해야 하며 그 법을 어길 시 재앙이 닥칠거라고 말한다.
부자가 천국의 문을 통과하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화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했다.
천국으로 가려면 헌금을 많이 내라고 한다.
'죄를 지어 내세에서 영원한 저주를 받을까봐 두렵다면 지갑을 열어 면죄부를 사면되는가?'


우리가 만든 법칙 이므로 바꿀 자유도 우리에게 있다.

 

 

모든 종교의 신자들은 자기 종교만이 진정한 종교라고 확신한다.

 


하지만 집단적인 제도로 과학과 종교는 진리보다 질서와 힘을 우선시 한다.
그러므로 이 둘은 의외로 잘 어울리는 짝이다.
근대사를 과학과 특정 종교, 인본주의 사이의 계약 과정으로 보는 것이 훨씬 더 정확한 관점일 것이다. 근대 이후의 사회는 인본주의 교의를 믿고, 그 교의에 의문을 제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교의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 과학을 이용한다.

 


힘을 계속 추구하게 하는 동력은 과학의 집노와 경제 성장의 동맹이다.
대부분의 역사에서 과학은 굼벵이 같은 속도로 진보했고, 경제는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오늘날에는 성장이 모든 사람의 뇔을 지배하지만, 전근대 시대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성장이라는 개념이 아예 없었다.

모두 인간의 생산은 일정하고, 따라서 부자가 되는길은 남의 것을 약탈하는 것뿐이며, 그들의 손자들도 더 나은 생활수준을 누리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이런 경제적 정체의 한가지 큰 원인은 새로운 사업을 위한 자금 조달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자금 조달이 어려웠던 이유는 그 시절에는 신용거래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고, 신용거래가 거의 없었던 이유는 성장에 대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며, 사람들이 성장을 믿지 않았던 이유는 경제가 정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생각해보자면 자본주의와 반대되는 성향이다. 폭발적 성장을 이룬 이유는 대출과 신용 그리고 자금의 융통이다)

 


근대에 이르러 미래에 대한 신뢰가 커지고 그에 따라 신용거래라는 기적이 일어난 덕분에 경제가 성장한다.
신뢰가 증가하고 신용거래도 확대된다. 그러면 이자율이 떨어져 돈을 조달 하고 경제가 성장한다.
그 결과 사람들은 미래에 더 큰 신뢰를 가지고, 경제는 계속 성장하고 그와 함께 과학도 발전한다.

 


인본주의 등장
인간이 스스로에 대한 확신을 얻으면서, 윤리적 지식을 획득하는 새로운 공식이 등장했다.
지식 = 경험 X 감수성
경험이란 무엇일까? 감각, 감정, 생각으로 이러우진 주관적 현상이다.
그러면 감수성이란 무엇인가?
감각, 감정, 생각에 주목하고 나에게 미치는 영향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공식은 대중문화뿐 아니라 전쟁 같은 무거운 쟁점들에 대한 인식까지 바꿔놓았다.
전쟁에서지휘관보다 전투 자체에 초점을 맞출때 개인의 감정보다는 집단적 작전에 훨씬 더 관심이 많았고, 대형, 작전, 전투행동을 기록하며 이 승리를 기념하고 했지만, 일반 병사들의 경험과 감정에는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왕과 장군들은 점점 가장자리로 밀려났고, 조명의 위치도 일반병사와 그의 경험으로 옮겨갔다.
진실은 전쟁터 위로 천사가 날아다니기는 커녕, 부패한 송장이 무너진 서까래에 매달려 비난의 손가락질을 할 뿐이었다.

결국 모든 의미는 개인의 경험에서 나온다고 보았고, "나는 고통스럽고, 이 전투는 나빠."

 

인간이 세상의 중심이 된다는 인본주의 사상


전쟁 경험은 ㅇㅇㅇ에게 세계에 대한 진실을 깨우쳐주었다. 세계는 자연선택이라는 비정한 법칙이 지배하는 정글이다. 이 진실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생존할 수 없다. 성공하고 싶다면 정글의 법칙을 이해하는 것은 물론 그 법칙들을 흔쾌히 받아들여야 한다. 그는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고, 전문기술도 정치잭 배경도 없었고, 무일푼의 이민자였다.

 


국민들은 그를 따르고 그에게 투표한 것은 ㅇㅇㅇ과 자신을 동일시 했기 때문이었고, 사람들 역시 세상은 정글이며 자신을 죽이지 않는 시련이 자신을 더 강하게 만든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ㅇㅇㅇ = 히틀러 였다.

 




현재 개인주의, 인권, 민주주의, 자유시장이라는 자유주의 패키지를 대신할 대안은 존재하지 않는다.
진정한 자유시장을 요구하며 보통 시민들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 진정한 대의 민주주의를 요구하며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 , 스페인의 15M운동 이 일어났는데
그런데 증권거래소와 의회를 누구보다 호되게 비판하는 사람들 조차 세계를 운영할 마땅한 대안모델을 갖고 있지 않다.

 


19세기 중엽소수의 국가들만 신속한 산업화를 이루었다. 이들 소수의 국가들이 세계를 정복했다. 대부분의 국가들은 무슨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몰랐다.

 


21세기 초 열차가 다시 정거장에서 빠져나가고 있다.
이 열차는 아마 호모 사피엔스라 불리는 정거장을 떠나는 막차가 될 것이다. 이 기차를 놓친 사람들에게는 다시 기회가 없을 것이다. 좌석을 얻기 위해 당신은 21세기의 기술을 이해해야 하고, 그중에서도 특히 생명공학과 컴퓨터 알고리즘의 힘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21세기의 주력상품은 몸, 뇌, 마음이 될 것이고, 몸과 뇌를 설계할 줄 아는 사람들과 그러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의 격차는 훨씬 더 클 것이다. 뒤처진 사람들은 절멸에 직면할 것이다.

 


백 년 전만 해도 사회주의는 최신흐름에 발을 맞추었지만, 지금은 신기술을 따라잡는 데 실패 했다.
자유주의자들은 정보화시대에 훨씬 잘 적응했다.

 


스스로 자문해보라
20세기에 가장 영향력 있는 발견, 발명, 창조가 무엇이었나?
이 질문에 대답하기 어려운 이유는 항생제 같은 과학적 발견, 컴퓨터 같은 기술적 발명, 페미니즘 같은 사상적 창조를 포함해 후보목록이 많아 고르기 어렵기 때문이다.

 


다시한번 자문해보라
20세기에 전통종교들이 이루어낸 가장 영향력 있는 발견, 발명, 창조는 무엇인가?
이것 역시 어려운 질문인데, 고를 것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20세기 항생제, 컴퓨터, 페미니즘의 반열에 오를 만한 것으로 종교인이 발견한 것이 무엇인가?
이 두가지 질문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21세기의 큰 변화가 어디서 나올 것 같은가?

 


종교에서는 그들이 모든것이 옳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필요한 내용을 발견할 때까지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 한 페이지도 빠짐없이 샅샅이 읽는다.
찾은것을 창의적으로 해석할 경우 그들의 책, 또는 윤리, 종교적으로 다시 억지로 해석할 뿐이다.




3장


 

 

오늘날 세계는 개인주의, 인권, 민주주의, 자유시장이라는 자유주의 패키지가 지배하고 있다.
하지만 21세기 과학이 이 자유주의 질서의 근간을 흔들고 있다.
과학은 가치의 문제를 다루지 않으므로, 자유주의자들이 평등보다 자유에 더 가치를 두고 집단보다 개인에 더 가치를 두는 것이 옳은지 판단할 수 없다.

 

우리 각자는 결국 자유라는 요술봉을 휘둘러 스스로 결정을 내린다.

이것이 자유주의가 유권자와 소비자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이며, 가슴이 시키는대로 따르고 좋게 느껴지는 것을 하라고 가르치는 이유이다. 우주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우리의 자유의지 이고, 당신 외에는 아무도 당신이 실제로 어떻게 느끼는지 알거나 당신의 선택을 확실하게 예측할 수 없다.

 

자유를 관속에 넣고 못을 박은 것은 진화론 이다.
자유의지라는 개념이 받아들이지 않는다.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자연선택이 인간의 모습을 바꿀 수 있었겠는가? 진화론에 따르면 동물들이 하는 모든선택은 그들의 유전암호를 반영한다. 만일 어떤 동물이 적응도가 높은 유전자 덕분에 영양분이 풍부한 버섯을 고르고 건강하고 생식력 있는 짝과 교미한다면, 그 유전자들은 다음 세대로 전달될 것이다. 만일 적응도가 낮은 유전자 때문에 어떤 동물이 독버섯과 빈혈에 걸린 짝을 선택한다면, 그 유전자들은 멸종할 것이다. 하지만 어떤 동물이 무엇을 먹고 누구와 짝짓기 할지를 '자유의지'로 선택한다면 자연선택이 할일은 없을 것이다.

 

이런 과학적 설명을 들을때 사람들이 흔히 보이는 반응은 무시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자유가 있다고 느끼고, 자신의 소망과 결정에 따라 행동한다고 말한다. 이 말은 사실이다. 인간은 자신의 욕망에 따라 행동한다. 우리가 '자유의지'를 욕망에 따라 행동하는 능력이라는 뜻으로 정의한다면, 맞는말이다.

이 개념을 검증하는 것은 놀라울만큼 쉽다.
당신 마음속에서 어떤 생각이 갑자기 떠오르거든 이렇게 자문해 보라
'내가 왜 이 생각을 했을까?'
생각을 하겠다고 1분 전에 결정하고 그런 다음에 생각했나?
아니면 그 생각이 그냥 떠올랐나?
내 생각과 결정의 주인이 실제로 나라면, 다음 60초 동안 아무 생각도 하지 않겠다는 결정도 내릴 수 있지 않을까?
할 수 있는지 한번 해보라



자유의지의 존재를 의심하는 것은 단순한 철학 훈련이 아니다.
직접적인 뇌 자극을 통해 그 유기체의 욕망을 조작하는 것은 물론 통제까지 할 수 있다는 뜻이다.
뇌의 적소를 자극해 사랑, 분노, 두려움, 우울 같은 감정들을 일으키거나 없앨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환상을 갖고 산다
환상을 갖고 사는 것이 훨씬 더 쉬운 것은 그것이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신이나 국가 같은 상상의 실체를 믿게 하려면, 사람들이 가치 있는 뭔가를 희생하게 해야 한다. 희생이 고통스러울 수록 그 희생을 바치는 대상의 존재를 더 확실히 믿게 된다. 값비싼 황소를 제우스에게 바치는 가난한 농부는 제우스가 실존한다고 확신할 것이다. 그리고 과거에 황소들을 바친일이 헛되지 않았다고 믿기 위해 거듭해서 황소를 바칠 것이다.
과거의 고통이 무의미했음을 인정하지 않기 위해 미래에도 계속 고통을 겪는 쪽을 택한다.

아무리 설득력 있고 매력적일지라도 이갸기는 결국 허구이다.
'중세 십자군 전사들의 삶의 의미가 신과 천국에서 온다고 믿었고'
'현대의 자유주의자들은 인생의 의미가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우리 또는 우리 후손들에게는 아마 새로운 패키지의 종교적 믿음과 정치제도가 필요할 것이다.

세번째 천년의 초입에 자유주의가 직면한 위협은 '자유의지를 지닌 개인 따위는 없다'는 철학적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 기술들이다. 머지 않아 우리는 개인의 자유의지를 전혀 허용하지 않는 엄청나게 유용한 장치들, 도구들, 구조들의 홍수에 직면할 것이다. 민주주의, 자유시장, 인권이 과연 이 홍수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나를 더 잘 아는 시스템 (알고리즘)

자유주의는 이야기하는 자아를 신성시하고, 투표소, 슈퍼마켓, 결혼시장에서 선택할 권한을 이야기하는 자아에게 준다. 수백년 동안 그렇게 하는 것이 합리적이었던 것은 이야기하는 자아가 온갖 종류의 허구와 판타지를 믿는다 해도 그만큼 나를 잘 아는 시스템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나를 더 잘 아는 시스템이 생겼는데 이야기하는 자아에게 계속 권한을 맡기는 것은 무모한 일일 것이다.

 

불멸 행복 신성

20세기 인간의 거대한 프로젝트 (기아, 역병, 전쟁을 극복하는 것) 는 모든 사람에게 예외없이 풍요, 건강, 평화의 보편적 표준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21세기의 새로운 프로젝트 (불멸, 행복, 신성을 얻는 것) 역시 포부는 인류 전체를 위한 것이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들의 목표 는 기준 지키는 것이 아니라 능가하는 것이다.

 

은하계의 주인

첫번째 인지혁명이 일으킨 혁신들 덕분에 호모 사피엔스가 상호주관적 영역에 접근하고 지구의 지배자가 되었다면,
두번째 인지혁명으로 탄생할 호모 데우스는 지금의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새로운 영역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고 결국 은하계의 주인이 될지도 모른다.

 

고난한 삶의 개미

염소 무리에서 가장 골치 아픈 존재는 대개 가장 똑똑한 염소이다.
소수의 엘리트 특권계층으로 인해 수백만 년 동안 우리는 성능이 향상된 침팬지로 살았다.
그리고 미래에는 특대형 개미가 될지도 모른다.


 

자유시장과 자본주의

자유시장 자본주의는 데이터를 분석하고 결정 내리는 일을 저마다 독립적이지만 상호 연결된 많은 프로세서들에게 배분한다.

데이터 처리의 관점에서 보면 자본주의자들이 낮은 세금을 선호한다. 무거운 과세는 이용 가능한 자본의 상당 부분이 한장소(국고)에 쌓이게 하고, 그 결과 정부라는 단일한 프로세스로 결정 과정이 집중할 수 밖에 없다. 이는 지나치게 중앙 집중화된 데이터 처리 시스템을 만들어낸다. 세금이 엄청나게 높은 극단적인 경우, 거의 모든 자본이 정부의 손에 들어가므로 정부가 모든 것을 지배한다. 자유시장에서는 한 프로세서가 잘못된 결정을 내리면 다른 프로세서들이 잽싸게 그 실수를 활용한다. 하지만 단일한 프로세서가 거의 모든 결정을 내릴 때는 실수가 재앙을 초래 할 수 있다.
(-> 특권 엘리트층 권력집중)

자본주의가 냉전에서 승리한 것은, 적어도 기술 변화가 가속화되는 시대에는 중앙 집중식 데이터 처리보다 분산식 데이터 처리가 더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19세기와 20세기의 산업혁명은 속도가 그리 빠르지 않아서 경로를 규제하고 조종할 수 있었다. 현재 기술혁명은 정치 과정보다 빠르게 움직이면서 의원들과 유권자들의 통제를 벗어나고 있다.

현재 기술은 너무나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데, 의회도 독자자들도 미처 다 처리할 수 없는 데이터 앞에서 어쩔 줄을 모르고 정부는 나라를 운영할 뿐 이끌지 못한다. 공무원 급여가 제때 지급되고 하수도가 넘치지 않게 할뿐, 20년 뒤 나라가 어디로 갈지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이 없다.


 

알고리즘

인간이 인간보다 훨씬 더 많은 데이터를 흡수하고 훨씬 더 효율적으로 처리하는 데이터 처리 시스템을 창조한다면, 그 시스템은 인간이 인간보다 더 우월하지 않을까?

개인은 점점 누구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거대 시스템 안의 작은 칩이 되어가고 있다.
세계경제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세계정치가 어디로 향하는지 어느 누구도 이해하지 못한다.

전통적인 종교는 당신은 매순간 당신을 지켜보며 당신의 생각과 감정에 신경 쓴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제 당신은 모든 말과 행동은 거대한 데이터 흐름의 일부이고, 알고리즘은 항상 당신을 지켜보며 당신이 행동하고 느끼는 모든 것을 신경쓴다고 말한다.

인본주의는 경험이 우리 안에서 일어나고, 우리는 일어나는 모든 일의 의미를 우리 안에서 찾음으로써 우주에 의미를 채워넣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경험은 공유되지 않으면 가치가 없고, 우리는 자기 안에서 의미를 발견할 필요가 없다고 믿는다. 자신의 경험을 기록해 거대한 데이터의 흐름에 연결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알고리즘들이 그 경험의 의미를 알아내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말해줄 것이다.

지난 7만 년 동안 인간의 경험은 우주에서 가장 효율적인 데이터 처리 알고리즘 이었고, 따라서 인간의 경험을 신성시할 만 했다.

하지만 21세기에는 더 이상 감정이 이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알고리즘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전례 없는 연산력과 거대한 데이터 베이스를 활용하는 우월한 알고리즘을 개발하고 있다.


마치며


 

 



실제로 우리는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
기술이 결정론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똑같은 기술로도 매우 다른 종류의 사회들을 창조할 수 있다. 모든 시나리오는 예언이라기보다는 가능성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책이 현시점에 우리가 처한 조건화의 기원을 추적하는 것은 그 얽매임에 벗어나 다르게 행동하고, 미래에 대해 훨씬 더 창의적인 방식으로 생각하기 위해서이다.

세계는 전보다 빠르게 변하고 있고, 우리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데이터, 개념, 약속, 위협이 밀려들고 있다. 인간이 자유시장, 집단지성, 외부알고리즘에 권한을 양도하는 것은 우리가 데이터의 홍수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고대에는 힘이 있다는 것은 곧 데이터에 접근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오늘날 힘이 있다는 것은 무엇을 무시해도 되는지 안다는 뜻이다.

마치면서 많은 말 보다는 많이 느끼고 많이 생각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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